무겁다. 여주는 손에 쥔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가지런히 개켜놓은 수건이 차곡차곡 들어있었다. 배구부놈들이 이번 여름 합숙에서 쓸 수건이 들어 있는 바구니. 그런데 나는 왜 이걸 들고 차에 짐을 싣고 있는 걸까. 에어컨 켜 놓은 집에서 종일 뒹굴뒹굴해도 모자란, 황금 같은 여름방학에. 정말 모를 일이다. 빈틈없이 채워놓은 덕에 생필품 바구니가 꽤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그녀 마음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숨을 푹 쉰 여주는 바구니를 후배에게 건넸다. 대기하고 있는 차에 억지로 몸을 실었다.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여주야, 제발. "
"싫어."
" 아 함만 같이 가자. 진짜 제발!"
" 안 가. "
오늘도 아츠무는 꼴값을 하였다. 아츠무는 1교시가 끝난 첫 쉬는 시간부터 매 시간마다 여주네 반에 도장을 찍었다. 하는 말이라곤 "아 제발!" "한 번만 같이 가자!" 같은 말뿐이었는데, 다소 일방적인 구애처럼 느껴지는 그 애처로운 외침을 여주는 칼같이 끊어내었다. 줄곧 책상에 앉아 있던 그녀가 아츠무를 올려보는 모양새였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녀와 아츠무 관계에서는 모종의 서열이 느껴졌다. 여주가 갑, 아츠무는 을도 아니고 병 정도는 되려나. 이 학교에서 아츠무를 저렇게까지 애걸복걸하게 만드는 사람은, 적어도 동급생 중에서는 그녀 뿐이었다.
" 여주야 진짜 니가 꼭 필요하다."
" 싫다 했다."
" 아 진짜!!"
아츠무의 회심의 일격.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여주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여주는 이 또한 가볍게 무시했다. 무뚝뚝한 여주의 대답을 듣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아츠무가 짜증을 냈다. 방금 눈썹을 내리고 불쌍한 척을 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럼 그렇지, 여주가 아츠무를 향해 눈을 흘겼다.
" 도대체 너거 운동부 합숙에 내가 왜 따라 가냐고. 매니저도 아닌데."
아츠무가 뭐라 하든 싫어, 안 가, 두 마디로 일축했던 여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작은 변화로도 매우 큰 성과를 얻었다는 듯 아츠무가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 합숙은 매니저 아니어도 갈 수 있다!"
" 그럼 뭔데. 가서 밥이랑 빨래 시키려고? 딱 질색이다. "
" 밥은 합숙소에서 다 차리 준다. 빨래는 우리가 알아서 하께. 절대 니 안 시킬게!"
조금만 더 하면 여주가 넘어올 것 같았는지, 아츠무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들떴다. 진짜 매니저 아니어도 갈 수 있다! 감독님도 된다 했고 키타상도 된다 했다! 니는 몸만 오면 된다! 특히 저어얼대 잡일은 없다며 강조하는 꼴이 꽤 볼만했다. 그런 아츠무에 여주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보는 척하다가 이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 야, 근데 니는 운동한다 쳐도 나는? 나는 그 산골에서 뭐 하라고. 니 말처럼 밥도 빨래도 안 하는데. "
왠지 허를 찌른 듯한 여주의 말에 아츠무는 말문이 막혔다. 뭐.. 드링크 탈래? 그건 잡일 아이가. 그럼 니도 배구할래..? 내 운동 싫다고 골백번 말했다. 아츠무가 무슨 말을 하든 완벽히 방어하는 여주의 모습에 잠자코 듣고 있던 스나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도돌이표네. 여주의 옆자리에 앉은 스나는 그저 이 상황이 재밌었다.
" 귀가부가 거까지 따라가는 것도 웃기잖아. 난 안 갈란다. "
여주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러니 더이상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 다 넘어왔는데.. 앙다문 입술 너머로 아츠무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주는 일부러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츠무는 완강한 여주를 초조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표정을 싹 바꿨다.
" 니, 금마 때문이가?"
순간 여주의 동공이 살짝 커진 것처럼 보였다.
오, 진짠가 보네. 니 금마 때문에 안 갈라 하는거제! 아츠무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여주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낸 아츠무는 건수를 잡은 듯 신이 났다. 덕분에 시종일관 미동 없던 여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아츠무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니 설마 아직 금마.. "
" 조용히 해라."
여주가 빠르게 아츠무의 입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교실에 찰싹!하고 차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나는 이 일련의 동작이 흡사 모기를 잡는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약간은, 오사무의 스파이크 폼과 닮았다고. 어쨌든 아직 여주 손이 닿고 있는 아츠무의 입 주변이 꽤 얼얼할 것은 확실했다.
여주는 아츠무의 얼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렸다. 누가 못 들을 이야기라도 꺼냈다는 듯이 눈치를 살피다, 이내 아츠무에게서 손을 거뒀다.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 손이 와 이래 맵노!"
" 주둥아리를 잘못 놀리면 이렇게 되는 거다."
아츠무는 여주 손이 스쳐 간 입 주변을 감싼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아파 죽겠다는 둥, 니 땜에 강냉이 나간 거 같다는 둥, 니가 사무새끼보다 힘이 좋은 것 같다는 둥, 스파이크는 니가 쳐야겠다는 둥 여주 들으라는 듯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또 꼴값한다, 진짜. 그 모습을 여주는 한심하게 쳐다봤다.
" 니 말대로 그 일도 있고... 그리고 애초에, 너거 합숙에 내가 와 필요한 건데?"
말을 좀 해 봐라.
종일 아츠무에게 시달린 탓에 여주도 지쳐있었다. 여주로서는 이 실랑이를 끝낼 회심의 일격이었다. 또 왁왁대며 난리를 피울 줄 알았던 아츠무는 다소 시무룩해 보였다. 의외의 표정에 여주가 흠칫했다. 뭔데.. 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은.. 위험하다.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불쌍해 보이는 건데. 여주는 제 앞의 친구가 어쩐지 정말 간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주야... 진짜... 내 진짜 니가 꼭 필요하다. "
그 순간 아츠무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앉은 그녀는 또 한 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창문 너머로 올려다보니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다녔다. 날씨 좋은 거 봐라. 이 좋은 날 내가 왜 땀 냄새나는 남자애들을 따라 산골로 가야 되는데. 게다가 이나리자키 운동부 합동 행사다. 사람은 많고 어색한 사람은 더 많을 게 분명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츠무는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산골 합숙소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을 게 아닌가. 시작이 언제건 결국엔 다른 운동부 매니저들 일을 거들게 될 것이다.
아, 진짜 괜히 간다고 했나. 여주는 괜히 백팩에 대충 쑤셔 넣었던 교과목 필기 노트 몇 권을 떠올렸다. 물론 합숙에서 진짜 공부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보험이었다. 배구부 훈련 중에 심심해지면 노트라도 뒤적여볼 심산이었다. 아니면 산골 탐험이라도 하지 뭐. 아니면 진짜 산나물이라도 캐러 나서야 되나. 여주가 괴로운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왔나."
"여주야 안녕."
오사무와 스나였다. 차에 올라타면서 알은체를 하는 둘을 쳐다보며 여주는 대충 인사를 해 보였다. 둘 다 검은색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기럭지가 기니까 대충 주워 입어도 뭔가 있어 보였다.
잠깐. 나도 검은색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입었는데? 나는 그냥 일꾼 같은데? 여주는 왠수같은 아츠무와 똑닮은 그의 쌍둥이의 길쭉한 다리를 보자 괜히 심통이 났다.
오사무와 스나 뒤에 아츠무는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노란 머리가 보이지 않자 여주는 오사무의 뒤쪽을 힐끗 보고 말했다. 사무, 츠무 어딨노? 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놈은 지금 어딨는 건데. 여주가 한탄하듯 툭 뱉었다. 그 말에 대답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 여주야, 우리는 악의 구렁텅이로 가는 게 아니다. 그냥 훈련하러 가는 거지."
뒤이어 차에 올라타던 키타가 옅게 웃었다.
" 헙, 키타선배. 안녕하세요... "
키타의 등장에 놀란 여주가 자세를 고쳐 앉고 인사를 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키타 앞에서는 등허리를 쭉 펴게 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 그래 여주야. 같이 가니까 좋네. "
키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키타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왠지 꼼짝없이 열과 성을 다해 합숙에 참여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여주는 배구부원도 아닌데 배구부 주장인 키타가 불편했다. 키타는 군기를 잡는 스타일도 아니고, 거북한 사람도 아닌데도 그랬다. 그냥 키타의 올곧은 몸가짐과 성정을 지켜보면 괜히 없던 기합이 생기는 것 같았다. 설마 츠무 그 단세포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둬놓은 건 아니겠지. 키타 선배가 있으면 눈치를 보게 되니까. 어쩐지 아츠무 페이스에 말려든 듯한 느낌을 받은 여주였다. 제 옆자리에 오사무와 스나, 앞 쪽 좌석에 키타까지 모두 착석을 마쳤다. 여주는 눈으로 차 안을 쭉 훑었다. 대충 탈 사람은 다 탄 것 같았다. 아츠무만 빼고.
" 야, 사무. 츠무랑 같이 안 왔나? 오긴 왔지? "
" 아. 츠무 밖에서 다른 부 아랑 얘기하고 있다. 어디였지? 농구부? "
" 응. 아츠무 반 농구부."
왜 또 농구부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짜증이 난 여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여주를 보던 오사무는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굴렸다 .
" 아, 그러고 보니 금마도 농구부제? 여주 니.. "
" 조용히 좀 해라! "
밖에선 입 좀 다물어라. 제발, 이 쌍디들아. 여주는 소리를 빽 질러댔다. 그덕에 차에 있던 배구부원 모두가 일제히 여주를 바라봤다.
여주야.. 조용히 해야할 건 너인 것 같은데.. 스나는 제 옆에서 씩씩거리는 여주를 보며 생각했다. 물론, 제 생각은 절대 입밖으로 내지 않을 거였지만. 여주는 중간에 낀 스나만 없었다면 얼마 전 아츠무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사무를 맹렬히 두들겨 팰 기세였다. 스나는 쌍둥이와 달리 한 번도 여주에게 주먹을 맞아본 적은 없었지만, 필시 엄청나게 아플 게 분명했다. 작은 주먹에 꽉 찬 강력한 한 방.
" 여주야.. 니만 조용하면 된다 여기서. "
" 사무새끼 니 때문이다이가!!"
스나가 한 번 삼킨 생각을 기어코 내뱉은 오사무 때문에 여주는 격하게 날뛰었다. 중간에 낀 스나는 안중에도 없이 때리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의 몸부림이 거셌다. 좁은 차 안에서 벌어진 한참 동안의 난투 끝에 마침내 여주는 오사무의 티셔츠 목 부분을 쥐어잡았다. 투닥대는 둘의 몸부림에 스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질 무렵, 차 문이 다시 열렸다.
" 여주 니 일찍 왔네! "
아츠무였다. 여주를 보고 반색하며 가뿐하게 차에 올랐다. 여주가 제 쌍둥이의 멱살을 쥐고 있든 말든 싱글벙글이었다. 그저 여주가 합숙에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듯, 드물게 화색이 도는 아츠무의 표정을 보고 후배들이 놀라 수군거렸지만 그건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 그래, 누구 때문에 지금까지 짐 날랐다. "
여주가 주먹을 가볍게 쥐어 괜히 등허리를 톡톡 두드려보였다.
" 맞나? 그러고 보니 니 와 이래 일찍 나왔는데? 내가 니는 늦게 나오라 했다이가. 일찍 나오면 짐 옮겨야 한다고."
그랬다. 아츠무는 합숙 훈련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여주에게 잘 생각했다며, 대신 니는 특별 깍두기라며, 집합하는 날 너무 일찍 오지 말고 바로 차에 가서 편안하게 앉아서 쉬라고 연신 당부했다. 그랬지만 그 '특별취급'이 영 불편했기에 여주는 꽤 이른 시간부터 수고가 많았다.
" 몰라. 눈이 일찍 떠져서 그냥 왔다. "
" 뭔데. 니 할매가. "
" 죽는다, 진짜. "
아츠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주먹을 쥐어 들어보이는 여주에게 씩 한 번 웃어보였다. 그리곤 곧장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츠무에게 대충 대꾸한 여주는 노란 머리가 의자에 가려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북적이던 학교 운동장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다른 운동부들도 출발할 채비를 마치고 모두 차에 탑승한 모양이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만이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배구부원도, 매니저도 아닌 귀가부인 여주가 이나리자키 운동부 여름 합숙에 참여하는 건 본인이 생각해도 영 이상했다. 아무리 쌍둥이와 친분이 두텁다지만, 부외자가 합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한 배구부 감독님의 의중도 궁금했다. 도대체 아츠무는 감독님과 키타선배에게 저를 뭐라 설명하고 여기까지 끌고온 것일까. 아츠무는 합숙에서 내가 왜 필요한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여주는 배구부원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일찍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비품도 옮기고 아침부터 여기저기 뛰어다닌 덕에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기왕 단체 합숙에 따라가기로 한 거, 배구부는 물론이고 다른 운동부원에게도 성실한 잡일꾼으로 보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또 이런저런 헛소문으로 골치 아플 게 눈에 선했으니까.
잠시 후 배구부 감독이 마지막으로 차에 탔다. 키타가 앉은 배구부원들의 머릿수를 빠르게 세며 최종적으로 인원을 점검했다. 키타는 빠트린 비품이 없는지 체크 리스트를 찬찬히 훑었다. 여주는 배구부 주장의 노련한 동작을 보며 꼼꼼한 게 딱 키타 답다고 생각했다. 키타와 감독까지 모두 착석을 마치고, 이어서 시동이 걸리는 듯 의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곧 차가 출발했고 동시에 익숙한 풍경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차창 너머를 보며 왠지 아득한 기분이 드는 여주였다.
아, 산골, 진짜 가는 거가..... 싫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엔 너무 일찍 일어났나 보다.
"여주야. 다 왔어. "
옆자리에 앉은 스나가 큰 손으로 여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스나의 손길에 여주는 부스스하게 잠에서 깼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합숙소에 도착했다.
꿈도 안 꾸고 엄청 푹 잤다. 생각보다 안 불편했네. 뭔가 정신이 맑아진 듯한 개운함을 느끼며 여주는 차에서 내리는 스나를 뒤따랐다. 발을 내딛자 운동화 밑창 너머로 버석한 흙이 밟혔다. 그와 동시에 몰려오는 풀 냄새. 진짜, 정말, 와 버렸구나, 산골에... 꼼짝없이 소중한 여름방학 며칠을 땀내나는 운동부 애들이랑 같이 보낼 생각을 하니 우울함이 확 밀려왔다.
여주의 불편한 마음과 달리 합숙소 앞은 못다한 수다로 재잘대느라 신이 난 운동부원들로 활기가 넘쳤다. 나만 빼고 다들 청춘이구만. 차에서 내린 여주는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오사무가 여주야, 하품하든 기지개를 피든 하나만 해라, 꼴사납다. 라며 괜히 핀잔을 줬다. 여주는 오사무를 향해 발차기하는 시늉을 했다. 가볍게 뒤로 물러나는 그를 보며 언제나처럼 오사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스트레칭을 이어가는 여주를 뒤로하고, 질서 없이 마구 섞인 인파 속에서 각 부 주장들이 인원 체크와 함께 정리를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정신없던 합숙소 앞이 빠르게 정돈되는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운동부답게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있었다.
차에서 내린 순서대로 아츠무와 오사무, 그리고 그 뒤에 스나와 여주가 섰다. 두 줄로 늘어선 배구부를 따라 키타가 손가락으로 인원을 체크하며 지나갔다.
" 여주야, 피곤했어? "
" 어? 그랬나봐. 잘 잤어. "
왁자지껄한 와중에 여주 옆에선 스나가 말을 걸어왔다. 퍽 다정한 말투에 여주는 제 손으로 오른쪽 뺨을 한 번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너무 잘 자서 분명히 얼굴이 팅팅부었을 것이라고, 또 스나의 곱상한 말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 여주 니 억수 잘 자대. 합숙 체질인갑다. "
그 말을 들었는지 아츠무가 빙글 돌아 여주를 바라봤다. 역시 오길 잘했제? 아츠무가 킬킬댔다. 오사무도곧이어 한쪽 어깨를 틀어 짧은 대화에 참여했다. 여주는 연신 생글거리는 아츠무를 보니 괜히 심통이 났다. 별안간 여주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곧 그가 아츠무의 한쪽 팔을 낚아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니 때문에 내 소중한 방학이 날아갔다며, 출발 전에 약속한 것 꼭 지키라며, 아츠무의 팔을 꼭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 어. 꼭 지킬게! 오늘 밤부터 하면 되제?"
아츠무는 내 안 잊었다. 걱정하지 마라. 하며 눈을 반으로 접고 웃었다. 시종일관 기분 좋아 보이는 아츠무를 보며 여주는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아츠무에게서 손을 거두자, 오사무가 여주의 손이 떨어진 아츠무의 오른팔을 빤히 쳐다봤다.
" 뭔데 둘이? 밤에 뭐? "
" 그러게. 비밀 만드네. "
서운해. 스나가 장난스레 씩 웃으며 여주를 바라보았다. 스나와 오사무의 얼굴을 번갈아 본 여주는 귀찮은 얼굴로 무어라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아츠무가 더 빨랐다.
" 너거는 몰라도 된다. 너거말대로 비밀이거든. "
제 친구들을 향해 여유롭게 일축한 아츠무는 얄밉게도 몸을 빙글 돌려버렸다. 여주는 비밀이란 단어에 괜히 힘 주어 발음하는 꼬락서니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저래 말하면 더 궁금해한다이가.. 별것도 아닌데...
하여튼 아츠무랑 엮인 제가 잘못이었다.
오사무는 그런 제 쌍둥이의 옆통수를 약간 짜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아츠무에게 뭐라 말하려는데, 줄을 맞추며 옆을 지나가던 키타가 오사무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쳤다. 줄 맞춰서 잘 서 있으란 뜻이었다. 덕분에 오사무도 이내 앞을 바라봤다.
뒷줄에서 여주는 쌍둥이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계속 보다 보면 둘의 머릿속이 들여다보이기라도 할 것같았다. 아츠무도 오사무도, 뒤통수까지 이렇게 똑같이 생겨선 그 속은 왜 그렇게 다른지, 지금은 그 작은 머리로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지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우며 나를 귀찮게 하는지. 합숙 시작부터 남은 날이 막막했다. 여주는 발을 내려다봤다.
아. 진짜 시작부터 피곤하다. 진짜 괜히 온 것 같은데...
괜히 애꿎은 바닥만 차며 자신의 지난 선택을 후회하는 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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